황소걸음

사회주의 100년(전 2권)｜도널드 서순 지음｜강주헌 등 옮김｜황소걸음｜952쪽·840쪽｜4만8000원·4만4000원

유럽에 남은 사회주의 정부는 거의 없다.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에서 좌파 정당이 집권한 1990년대 말과 비교하면 옹색하기 짝이 없다. 프랑스 올랑드 정부처럼 아직까지 생존한 사회주의 정부도 승리 뒤 국민의 거센 반감과 맞닥뜨렸다. 1929년 대공황에 견줄 만한 세계적 경기 침체는 사회주의 부활을 위한 도약대가 되기는커녕 자본주의의 승리를 재확인해줬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Sassoon·68·사진)은 1800쪽, 3㎏에 이르는 이 '벽돌책'에 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를 담았다. 런던대학교 퀸메리칼리지에서 유럽 비교사를 가르쳐 온 서순은 이메일 인터뷰에서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할 때 번성한다"고 말했다. "복지국가나 부의 재분배 같은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개혁은 사회 평화나 소비재 시장을 확대해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제2인터내셔널이 탄생한 1889년부터 사회주의 정당의 등장과 집권, 공산주의의 몰락과 좌파 정당의 명암을 살핀다. 1996년 초판이 나왔을 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서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지난 100년간 자본주의를 문명화한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평했다. 거꾸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폐기(극복)라는 목표를 단념하는 과정으로도 읽힌다.

―기초적인 질문부터 하자. 왜 역사를 배워야 하나?

"원시적인 부족도 그들의 과거, 뿌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어땠는지 묻는다. 바꿔 말해 역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 역사는 성직자나 국수주의자, 이론가가 아니라 역사가의 손에 맡겨야 한다. 정치인들은 수퍼마켓에서 카트에 물건을 담듯이 팩트(사실)를 취사선택한다. 진실은 더 복잡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가가 존재한다. 아마도 우리는 그래서 인기가 없을 테지만."

―이 대작을 쓴 동기는?

"젊은 시절에 난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공산당을 주로 연구했다. 그런데 한 나라에 몰입할 경우 어떤 상황을 마치 그 나라에만 특수한 것처럼 바라보게 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을 깨닫고 비교 접근법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 발전과 민족국가, 지배 이념 등 다양한 제약에 직면한 사회주의 정당들의 역사를 다루고 싶었다."

―'좌파의 전망은 암울하다'고 썼다. 카를 마르크스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질문부터 던지겠나?

"마르크스 박사님, 당신은 이제 아무 쓸모가 없군요. 30년 전만 해도 당신 이론이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는데, 이제 어디가 남아 있죠? 쿠바? 북한?"

―자본주의를 생각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나?

"자본주의는 힘센 강물과 같아서 자연과 운(運),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받는다. 말라 버릴 수도 있고 제멋대로 흘러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적인 논리라곤 없다. 현대 자본주의는 지속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의 스승(박사 논문 지도교수)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다. 서순은 "역사 쓰기의 ABC를 홉스봄으로부터 배웠다"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는 '열린 마음으로 좌파·우파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배우라'고 가르쳤다"고 했다. 독자에게 서순은 '유럽 문화사'(전 5권)로 기억된다.

―사회민주주의는 유럽에서 왜 위기에 직면했나?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집권하면 복지, 재분배, 교통, 에너지 등에 중점을 두고 국가가 책임지려 한다. 그것이 성공적이려면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서 세금을 잘 거두고 지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불황이 닥쳐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면 사회민주주의는 더 심각하게 기반을 잃어버린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었나? 미국 진보주의자들은 왜 그 책과 사랑에 빠졌나?

"거대한 부의 불평등은 몇 해 전부터 지적해온 것이다. 부의 불평등은 19세기를 지나며 커졌고 자본주의가 고성장한 1945~75년 사이에는 눈에 띄게 감소했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은 추세가 뒤집혀 다시 가파르게 불평등이 증가했다. 미국에서 그 책의 인기는 놀라울 게 없다. 물려받은 재산은 중요하지 않고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자본'의 미덕은 뭔가?

"역사로 하여금 다시 경제학을 공부하게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불평등 문제의 핵심은 재산의 차이가 아니라 능력 차이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19세기에 말과 마차를 소유한 사람과 그것이 없는 사람의 격차는 지금 롤스로이스를 타는 사람과 소형차를 타는 사람 사이의 불평등보다 훨씬 컸다. 자본주의 아래 삶의 질은 지난 100년 사이에 엄청나게 개선된 셈이다."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반도 통일에 대해 전망한다면?

"그렇게 불쾌한 정권 아래 사는 북한 주민들에게는 슬픔과 연민을 느낀다. 한반도 통일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독일·베트남 사례를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현실은 실험실과 달라서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다. 통일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길 바랄 뿐이다."